『태양계 일기』 김근아 작가 인터뷰
내게 주어진 세상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으로 해 보며 살아가는 게
모든 생명체들의 ‘모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표지 이미지>
『태양계 일기』가 출간되었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태양계 일기』는 저를 그림책 작가로 만들어 준 소중한 책이에요. 출간은 『아들의 여름』이 먼저였지만 『태양계 일기』가 제게 처음으로 출판사에서 첫 연락도 받아 보고 첫 계약도 해 보는 경험을 안겨 주었거든요. 바로 지금의 고래뱃속에서요! 또, ‘내가 제일 푹 빠져서 잘 그리고 쓸 책을 만들어 보자’ 하고 깊이 이입하며 열심히 작업했던 책이기에 그만큼 애정도 많습니다. 그래서 『태양계 일기』 출간이 너무 반갑고 기쁘고 빨리 이리저리 많이 자랑도 하고 그러고 싶습니다.
『태양계 일기』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 너머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해, 아주 독특한 대답을 담은 그림책입니다.
이 이야기를 구상하게 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처음엔 지구인치고 우주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다, 하는 생각에서 단순히 우주가 배경인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행성과 별자리들의 이름과 전설을 들여다보니 제 생각보다 더 오랜 과거에서부터 우리 지구인들이 별에다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참 많이 담아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 지구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태양계의 행성을 빌려 아기로 태어나 노인으로 잠이 들 때까지의 이야기를 오랜 전설처럼 다뤄 보되, 저만의 방식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스토리 구상>
이 책은 어느 날 수성에서 눈을 뜬 한 존재가 태양계의 행성들을 차례로 돌아가며 지낸 평생의 기록이라는 가상의 설정으로 시작됩니다.
지구인이 아닌 가상의 ‘존재’를 캐릭터로 구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태양계 전체를 누비는 주인공의 여정이, 마치 옆 동네로 이사 다니는 것처럼 편하고 무언가 마법적인 여행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주선과 우주복이 필수인 (아마도 먼 미래에도 필요할 거 같아서) 지구인보단 무언가 남다른 존재가 주인공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놓고 외계인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구인들이 이 책을 읽고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게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었는데 동시에 무언가 빛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상흔처럼 보였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얗고 푸르게 그리니 또 너무 유령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주인공은 살아 숨쉬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드리고자 붉은 심장도 그려 넣었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환상적인 태양계의 풍경이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각 장면과 행성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특별한 일화나 작업 과정이 있었다면 함께 소개해 주세요.
태양계를 소재로 하니 이런 일도 생기네 하고 재밌었던 일화가 있습니다. 『태양계 일기』는 22년도 11월부터 24년 6월까지 작업된 책인데요. 그 사이에 토성의 위성 개수에 두 번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태양계 일기』는 각 행성별 특징이 주인공의 인생과 엮여있는 것이 포인트인데 저는 토성의 특징으로 태양계 행성 중 가장 많은 위성을 지닌 점을 이야기로 엮었거든요. 그런데 23년 2월쯤, 목성의 위성이 추가로 발견되어 갑자기 목성이 태양계 행성 중 가장 많은 위성을 지닌 행성이 되어버렸습니다. 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게, 저는 『태양계 일기』가 사실적인 고증을 기반으로 창작되는 이야기였으면 했어요. 마치 책 속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어딘가에 정말로 존재하는 대상처럼 느끼길 바랐거든요. 그런데 몇 개월 뒤, 5월쯤 되니 이번엔 토성에서 무려 62개의 위성이 추가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래서 토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많은 위성을 지닌 행성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죠. 그 뉴스를 접하고 저는 엄청 기뻤어요. 찝찝함 없이 예정대로 책을 진행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책 속에는 토성이 약 백사십여 개의 위성을 갖고 있다 쓰여 있는데 아마 시간이 흐르면 그 또한 과거의 기록이 될 수도 있겠네요. 왠지 그것도 그거대로 꽤 의미 있을 것 같아 은근 기대 중입니다. 물론 목성이 위성 개수로 토성을 다시 따라잡으려면 꽤 힘들 것 같지만요.
책 속에는 토성이 약 백사십여 개의 위성을 갖고 있다 쓰여 있는데 아마 시간이 흐르면 또 목성이 갑자기 ‘백오십여··· 백육십여···’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왠지 그것도 그거대로 굉장히 재밌는 경쟁이겠네요. 하지만 목성이 다시 토성을 위성 개수로 따라잡으려면 역시 꽤 힘들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책 속의 토성처럼 우리의 토성도 영원히 가장 많은 위성을 품고 있는 행성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화성 채색 작업>
책에 등장하는 행성들의 모양새와 특징 등은 모두 섬세한 고증을 거쳐 표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태양계 일기』를 작업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행성 혹은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위 질문에서 답했듯이, 과학 관련 기사나 유튜브 등을 찾아보며 최대한 책 내용 안에서 사실이 밑바탕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우주는 환상적이지만 완전히 허구는 아니니까요. 물론 창작될 만한 부분에는 과감하게 상상력을 더 불어넣으면 좋겠다고 고래뱃속에서 얘기해 주셔서 책이 더 완성도 있게 나온 것 같습니다.
『태양계 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행성은 당연 ‘화성’입니다. 주인공은 화성에서 젊은 청년 시절을 보내는데 저 스스로도 내 인생은 지금 화성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며 작업했거든요. 오래된 절친에게 『태양계 일기』의 더미북을 보여주었을 때도 친구가 “우리는 지금 화성에 있는 건가” 하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후에 수정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화성의 붉은 그림은 개인적으로 좀 애틋한 마음으로 그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행성들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모험을 보고 있노라면, 저 먼 태양계의 행성들이 우리의 삶과 닮아 있는 듯 느껴집니다.
이 책을 통해 작가님께서 전하고 싶으셨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질문해 주신 그대로입니다! 사실 제 의도가 인생에 대한 거대한 고찰을 담는다거나 무언가 뜻하는 바가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아직 화성까지밖에 여행하지 못한 지구인이라서요. 저는 그저 우리와 닮은 누군가의 ‘단 하나의 이야기’를 잘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전하고 싶었던 건 그저 익숙하면서도 신비로운 우주 같은 우리들의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책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그리면서 가장 좋았던 장면이 있을까요?
그림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드는 장면은 주인공이 마지막 해왕성으로 날아가면서 멀리서 명왕성을 슬쩍 보게 되는 장면입니다. 노인이 된 주인공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의 길처럼 보여서 괜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거든요. 또, 그리고 나서 가장 만족도 높았던 장면은 첫 번째 목성 장면입니다. 주인공에겐 괴로운 시간이었겠지만 절벽 사이로 휘몰아치는 파도와 번개를 그리는 게 꽤 재미도 있었고 완성본을 봤을 때 아주 혼란 그 자체로 잘 나왔다 생각이 들었거든요. 보통 그림을 그린다는 게, 완성된 모습을 계속해서 떠올리며 손으로 최대한 표현하는 건데 목성의 첫 번째 그림은 머릿속으로 떠올린 모습보다 훨씬 더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장면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해왕성으로 날아가는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고, 장면의 만족도를 생각한다면 혼란스러운 목성 내부의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천왕성과 해왕성 아이디어>
가장 고민이 많았던 장면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천왕성을 단순히 얼음 행성인 줄 알고 얼음 지대로 표현했다가 사실 천왕성에는 딱딱한 지반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중간에 천왕성 파트를 다시 그려야 했는데요. 그래서 땅 없이 춥고 악취 나는 행성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어떻게 담아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고래뱃속 식구분들이랑 제가 여러 개 그려둔 아이디어 스케치를 보며 함께 상의해서 지금의 천왕성을 그리게 되었는데요. 사실 길게 가져간 고민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당시에는 고증이 책에 어떠한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조금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통해 고증과 환상 사이의 중간 지대를 지금의 만족스러운 천왕성의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떤 재료와 기법, 효과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셨어요?
오일 파스텔을 메인으로 인물의 이목구비 정도에만 약간의 색연필을 사용했습니다.
행성 내부가 아주 화려하기 때문에 불분명하게 그림을 그려버리면 자칫 어려운 추상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단단한 면봉으로 하나하나 살살 문지르며 매끄럽고 깔끔하게 작업했습니다. 더불어 테두리까지 그어서 말이죠. 하지만 깔끔한 작업 방식을 고수한다고 해서 색을 단순하게 쓰지는 않았습니다. 형태는 뚜렷하되 안에 담긴 색은 다양하고 오묘하게 담아, 사실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세상을 그리려 했습니다.
책을 작업하시면서 과정에서 특별히 신경 쓰신 부분이 있으셨나요?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과 내가 창작할 만한 미지의 부분 사이의 균형을 가장 신경 쓰며 작업했습니다. 그리고 글은 주인공이 행성별로 다른 나이대의 시절을 보내기 때문에 어린 시절은 어린 느낌으로, 어른이 되어서는 어른스럽게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또 가장 중요하게는, 주인공이 스스로 각 행성에서의 일화를 되돌아보는 식으로 일기를 남겼다는 점을 책 전반에서 독자들이 느끼길 바랐습니다. 이런 뉘앙스와 행성별 특징을 잘 버무리기까지 고래뱃속과 정말 많은 메일을 주고받은 것 같아요. 결국엔 정말 정말 마음에 드는 이야기로 잘 남겨지게 되어 너무 좋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초기 작업 사진>
수성에서 해왕성에 이르기까지 모험을 마친 주인공이 결말에 다다랐을 때, 마지막 장면에 담고 싶으셨던 의미가 궁금합니다.
마지막 텍스트 그대로, 『태양계 일기』 속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끝난 것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느끼고 있다는 점을 담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죽음처럼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정말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는데요. 어찌 되었건 저는 그 둘 다 새로운 모험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고 느껴집니다.
실제로 저도 훗날 제 유언을 들어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태양계 일기』 속 주인공의 마지막 기록을 그대로 남겨두고 가고 싶습니다.
영혼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마주할 ‘진짜 모험’이란 무엇일지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주인공은 신비롭고 마법 같은 존재이지만 자신이 도착한 행성에서 어떤 초월적인 행동을 직접적으로 하진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것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잔뜩 하며 인생을 살아가죠. 이는 제가 ‘산다’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내린 결론과도 같습니다. 얼음이 있는 행성에서 태어나면 얼음을 장난감 삼으면 되고, 바람이 많이 부는 행성에서 살면 신나게 뛰어놀면 되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폭풍 속에서 스스로를 건지고, 아기 위성들을 돌보며 삶의 가치를 느끼기도 하면서요. 이렇게 내게 주어진 세상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으로 해 보며 살아가는 게 모든 생명체들의 ‘모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지금도 어딘가에서 저마다의 여정을 일구어 가고 있을 독자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나 응원, 조언 부탁드려요.
각자의 행성에서 각자의 시절을 보내고 계실 독자 여러분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어 내려간 태양계 일기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해 보니 참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정은 왜 항상 어두운 터널로 사람을 이끄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기도 하죠. 그래도 이 여정이 한 편의 영화와는 다르게 장르가 정해져 있지는 않아 참 다행입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나 미스터리, 호러물로 흘러가도 되는 건가 싶다가도 어느새 보면 또 시트콤처럼 변해 있는 게 살아가는 것이더라고요. 그러니 장르 같은 건 정해놓지 말고 계속 변화하는 이 변덕스러운 여정을 함께 치열하게 탐미해 나가 봐요.
<천왕성 채색 작업>
전작 『아들의 여름』에 이어 이번에도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 너머의 영원성에 대해 작가님만의 상상과 그림으로 엮은 이야기가 탄생했습니다.
다음으로 새롭게 구상 중이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질문을 보고 꽤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의 여름』 때도 그랬네요. 재밌는 점을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일단 세 번째 책이 될지도 모를 다음 책도 고래뱃속과 함께하고 있는데요. 이번엔 좀 더 일상에서 느끼는 실패의 상처를 다뤄보려 합니다. 특히나 실패에 예민한 어린 시절에 말이죠. 저도 노력한 후에 얻는 것이 없거나 적으면 거기서 오는 좌절감이 엄청난 사람으로서 좀 더 일상의 아픔을 그려내 보고 싶었습니다. 아, 그리고 아직은 머릿속으로 구상해 놓고 있는 게 있는데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아픈 역사인 ‘운디드니 대학살’ 에 대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요즘 제가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라는 책을 읽고 있거든요. 아직은 상상만이지만 읽는 내내 너무 슬프면서도 왠지 그림책으로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태양계 일기』는 ( )이다.” 빈칸에 어떤 말을 넣고 싶으세요?
‘산소통’이다! 아쉽게도 저 같은 지구인은 『태양계 일기』 주인공과는 다르게 산소통이 없으면 우주를 모험하기는 어려워서요. 그런데 이미 지구에서의 모험도 꽤나 스펙타클하다 보니 간혹 산소통이 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를 그림책 작가로 불릴 수 있게 해준 『태양계 일기』는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의 새 모험을 위해 달린 산소통과도 같습니다. 왠지 아주 든든하고 오래가는 산소통이 되어줄 거라 믿게 되네요.
<표지 아이디어 스케치>
독자들이 『태양계 일기』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태양계 일기』는 꽤나 깊은 이야기지만 사실 독자님들의 인생 어느 부분과도 닮은 점이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을 느끼면서 읽어보신다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 빛나는 존재를 자신처럼 대입해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책에 들어가기 앞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적혀 있는 글처럼 이 신비로운 존재의 일기를 몰래 훔쳐본다는 느낌으로 접근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태양계 일기』를 읽어 주신, 읽어 주실 모든 독자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첫 그림책 『아들의 여름』 때도 느낀 건데, 제 책을 읽어보시고 해주시는 모든 말들이 정말 하나하나 어마어마한 가치로 제게 스며들더라구요. 그런 귀중한 경험을 하게 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